송구영신, '청년'되어 청년에게 다가가서소...
개벽(開闢) 시대, 나이 잊고 새 세상 건너시라.
망(亡), 잃고 망하고 도망간다는 흉한 뜻이다. 마음 심(心)을 붙이면 잊을 忘(망)이다. 이 忘 글자가 되레 아름답게 쓰인 말이 망년(忘年)이다.
아직 ‘망년회’란 말이 연말이면 나돈다. 일제의 잔재(殘滓)다. 왜인(倭人)들의 세시풍속이었다. 좋은 뜻 아니니 쓰지 말자고들 하여 이제 대개 송년회(送年會)로 바뀌었다.
노망(老妄) 망언(妄言) 할 때의 妄자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술 마셔서 한 해를 잊(어버리)자는 게 멋지지 않다. 송년회 풍속도 이제 달라지고 있단다.
잊을 건 따로 있다. 이를테면 탐욕(貪欲) 진에(瞋恚 노여움) 우치(愚癡 어리석음)의 貪瞋癡는 그래도 된다. 아니, 잊어야 한다. 불교에서 세 가지 독(毒)으로 치는 번뇌(煩惱)들이다.
원 세상에, 코로나 넘어서면서까지 낑낑대며 살아온 한 해를 깡그리 버리면 될 것인가. 말이 천박해지면 뜻도 불결해진다. 망년의 원래 뜻 살피면 이 뜻 더 실감날 것이다.
‘망년’이 아름답다고? 망년지교(忘年之交)나 망년지우(-友)란 말을 보자. 세대차 논의 분분(紛紛)한 요즘 더 필요한 말이겠다. 뜻(마음)이 통하는 이들끼리 나이를 잊고 우정을 나눈다는 얘기다. 역사에 멋진 사례가 있다.
고려 최고의 글쟁이로, 풍류 기막힌 멋쟁이로도 꼽히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얘기다. 관련 일화(逸話)나 기담(奇譚)도 많다.
그는 주몽을 주인공으로 세운 고구려 건국설화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써서 겨레의 기상을 우뚝 세웠다. ‘점령군’ 몽고(원나라)의 억압에 대해 고려의 참혹한 상황을 적어 너그러운 조처를 부탁하는, 그래서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 ‘진정표(陳情表)’로도 유명하다.
무신(武臣)정권 시대, 문신(文臣)의 기구한 신세로 젊어서 방랑자처럼 살았으되 중년 이후 (글 쓰는 일로) 펄펄 날았다. 벼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이규보 삶의 배경에 35세 연상 친구인 오세재(1133∼미상)가 있었다.
오세재 53세 때 18세의 이규보와 마음을 열고 학문과 시를 주고받았던 일이 망년지교의 화려한 사례로 회자된다. 오세재는 ‘파한집’의 이인로나 임춘, 함순 등의 석학들과 어울렸던 당대 최고 문인 중 한 사람이다.
젊은 白雲의 뜻에는 당연히 오세재의 마음이 스몄으리. ‘누가 누구를 키웠네.’ 따위의 말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지는 두 사람 사이, 아름답지 않은가?
나이 말고, 인품과 학문의 높고 귀함을 따져 만나고 시(詩)와 세상을 논하는 상서로운 만남이 망년이었다. 보통 연상인 이가 연하인 이에게 ‘벗으로 사귀자’ 제안하여 모양새가 이뤄졌다.
나이를 극복한 지혜로운 이들끼리의 아름다운 우정을 설명하는 말 ‘망년’이 어쩌다 저리 오염됐을꼬. 또 그런 미덕은 왜 우리에게 기억조차 아득한지. 되살리자.
노인 머릿속 지식의 축적(蓄積)이 지혜나 방법론일수만은 없는 개벽(開闢)의 시대다. 자칫 노망(老妄)되기 쉽다. 세상을 읽자.
AI가 이미 와 있다. 일백 세(歲) 어쩌고 하며 나이 간판삼아 고리짝 생각이나 장삿속 언사로 ‘아이들에게’ 신기한 오락거리 되고 있는 ‘어른들’을 생각하는 계기이기도 하겠다.
저 ‘탐진치’처럼 (잊어)버려야 할 것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노소(老少) 따지지 말고 스스로 숙고(熟考)해야 할 시점이 세밑이고 새해 아닌가. 청년의 마음 되어, 청년의 마음에 진심으로 다가서자.
나이 따위 잊은, 어진 여러분의 단기 4356년 계묘년(癸卯年) 새해에 축하를 보낸다.
강상헌 언어철학자ㆍ (재)아시아인문재단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