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탐(食貪)일 것이다. 미식(美食)의 본디를 늘 생각했다. 머리로, 입으로, 글로 '맛'을 논했다. 허나 다 가짜였다. 아내가 운동 중 손목을 다쳐 수술하는 바람에 부엌살림을 떠맡게 됐다.
설거지하다 문득 깨달았다. 4년째(부엌)칼잡이 보조의'고백'이다. 손과 마음으로 하지 않은 음식, 가짜다.
우리에게 음식 또는 밥상은 당연했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다들 그렇게 음식에 정성을 들이는 줄 알았다. 제사나 초상 때 할머니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여, 조상님들만 아시도록..." 하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남군 북평면의 큰집 정재에는 그런 기운이 서려있었다. 삭힌 회였는지, 찜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른들이 "이건 먹어봐야 돼." 하며 입에 물려주었을 것이다. 혼인(婚姻)같은 잔치에는 푸짐하게 나누는 음식이 즐비했다. 오래 전 시골의 장터 같았다는 기억이다.
할머니 돌아가시자 지휘권 물려받은 큰어머니는 "음석(음식)은 속이 실거워야 써, 겉만 번지르르 하면 안 돼..." 하셨다. 잔치는 명절 음식 싸서 보낼 때 혹시라도 서운해 하는 이웃이 없는지 늘 살피라고 하셨다. 나눔이었다. 선조들 그 말슴, 뜻 잃거나 잊으면 아니 된다
낙지호롱 매만져 굽는 것이 재미었었다. 해질 때 횃볼 들고 뻘에서 잡아온 게가 아침상에 올라온것도 신기했다. 발 짜는 것부터 해우(김)만드는 전 과정에 '참여'했다.
그땐 바다 '김밭'의 잡초였던 매생이를 가마솥에 끓여 김 건(조)장 나가는 머슴들 새벽 속풀이 국으로 퍼주었다. 지금은 김보다 비싸다던가. 큰집 음식에 얽힌 엷은, 맛난 추억들이다.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 남도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맛'을 안다.
세상이 하도 쉬 변해 경향(京鄕) 각지의 음식이 섞이고, 심지어 코카콜라와 스타벅스 커피로 거의 모든 인류가 서양 먹거리 홍수를 맞는 상황이다.
그러나 '먹어본 경험'의 그 맛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사라져 갈 뿐...
그렇게 현대사의 '나'에게, 또 남도의 '우리'에게 음식 또는 밥상은 당연했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남도'의 음식이 우리에게는 당연했고 지금도 당연하지만, 현대사의 확장된 이웃인 세계사람들에게는 당연할 수가 없다.
70년대 말 광주에서 학업을 마치고 서울로, 또 해외로 나가서 일하며 '우리 음식' 남도 게미(개미)를 늘 떠올렸다. 그 맛은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진한(징헌) 맛 짐치에 뚝배기 가득 주무른 벌건 서대 회 무침, 어머니의 손맛은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미각으로 기억하는 '엄니'의 뜻은 무었일까?
그 음식으로 뼈 속 골수(骨髓), 생각창고 뇌리(腦裏)와 마음의 틀 가슴을 채운 '나'는, 그 무리인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지역 종가(宗家)어른들이 모였다. 우리 음식문화의 정체(正體) 또는 본디를 찾는 구도자(求道者)의 오랜 갈구(渴求)에 단비 같은 화두가 내려지리라, 많은 이들도 함께 귀를 세웠다.
2022년 12월 광주향교에서 열린 '남도종가 음식문화 활성화 방안 심포지엄'의 의미였다. (사)전라남도종가회와 전라남도가 함께 마련했다.
제사 받들고 손님 대접하는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핵심인 종가음식의 전통을 야물게 정리해 후손들의 자랑이 될 결실(結實)로 맺어두자는 의논 모임이었다.
강상헌 언어철학자ㆍ (재)아시아인문재단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