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240회) <<무등공부방 아시아인문강좌>> ◎ 7월 13일(화) -주제: 영산강의 아우라, 포구와 옹관 다시읽기 -강사: 이윤선 교수 (중국 절강해양대 명예교수) ◎ 8월 10일(화) -주제: 거꾸로 자라는 나무, 개옹에서 흑조까지 -강사: 이윤선 교수 '비운의 독립운동가' 장재성 선생 추모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국보법 몰려,한국전쟁 총사로 70년째 인정 못받아 장재성기념사업회, 유족 장학금 전달…"항일투사 독립장 신설을" 정부로 부터 서훈을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고(故) 장재성(1908∼1950) 선생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5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공원에서 열렸다. 장재성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다. 그는 1926년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를 결성해 일제에 저항하다 체포됐으며 1929년 독서회를 조직해 활동을 이어갔다. 1929년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을 발생하자 투쟁본부를 조직, 산발적 시위를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장재성 선생은 해방이후 남북대표자연석회의 준비를 위해 월북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됐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시국사범으로 몰려 총살당했다. 그는 현대사의 비극으로 말미암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지 못한 74인 중 한명이다. 김상곤 장재성기념사업회 회장은 "독립유공자의 서훈은 해방 전 독립운동의 공적에 의거해 판단하는 것이 상식이다"며 "독립의 공적은 있으나 해방 후 잠시 행적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또 다른 명예훼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립훈장' 제도 신설을 제안했다. 그는 "대한민국에는 현재 독립훈장이 없다"며 "모든 항일투사의 가슴에 자랑스런 '독립훈장'을 달아드릴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신설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에선 장 선생을 기리는 공연도 펼쳐졌다. 극단 토박이가 장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무등의 빛 장재성'이라는 연극을 초연했다. 장재성기념사업회는 오는 11월 장재성 선생의 흉상 건립식과 함께 포럼을 개최한다. 또 코로나19 사태로 이날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페이스북과 유튜브 체널 등을 통해 온라인 추모제를 개최할 방침이다. 박하선의 사진풍경41>거창양민학살 추모공원에서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한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산청과 함양의 학살에 이어 거창군 신원면 일대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만행은 작전명 '견벽청야(堅壁淸野)' 산간마을들을 지나면서 무차별적으로 이어졌다. 빨치산 토벌이라는 구실로 이루어진 신원면 일대의 학살은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 지역에서 주민 18명을 포함하여 불과 사흘 동안에 이루어진 전체 희생자는 719명으로 58%가 노인과 어린이였다. 이 사건은 부산 피난 국회에 보내 온 용기있는 한 사병의 투서로 전 세계를 경악케 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을 성토케 했다. 영국에서는 파견한 UN군을 철수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화가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결국, 대대장 한동석, 연대장 오익균,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등이 중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도 지나지않아 이승만의 특별사면으로 모두 풀려났고, 이들은 다시 승승장구 하여 일본군 지원병 출신인 김종원은 전남경찰국장을 거쳐 치안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87년 민주화 이후 명예회복과 기념관은 건립되었으나 진실의 역사 앞에 참회하는 자 그 누가 있었던가. 비명에 가신 아비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식의 절규가 오늘도 우리를 눈물짓게 만든다. 전남일보 2021.06.24 (61928)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대로 1156 2층(농성동) 전화 062)366-2666 팩스 062)366-2667 이메일:mudeung2009@hanmail.net 후원회 계좌: 광주은행 1107-020-111595 연락처: 강성구 010-7213-13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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