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큰 사상가' 故 김지하 시인 추모시
윤명철 동국대 명예교수
哀哭, 김지하, 헌 생명 버리더니 새 생명 얻는군요.
저무는 봄 날
땅거미 질 무렵
흩날리는 비는 고마운 비다.
사람들, 주인의 손길 맘길에 벗어난
상추, 미나리, 감자, 부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캑캑 거리던 숨구멍들에 단물 흘려 넣으니까?
그가
안쓰럽다.
그가
불쌍하다.
어쩜
그리도 힘들게 삶을 살았을까?
누구랄 것 없이
삶은
헤아릴 길 없이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어도
그게 사람이고.
슬픔과 고통들 속에 뒹굴렀기에
기쁨 행복들 느끼고,
힘들고 어려운 줄 알면서도
갖은 의미들 주면서 삶을 지어가는 것인데.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이건 너무한 건 아닌가?
이렇게 삶을 마쳐서야 하는가?
그래도
잠시 쯤은
편안하게, 느긋하게
늘 잠겨 두었던
웃음들 꺼내 터뜨리며
남들처럼,
다만 얼마라도 살다가야 하지 않은가.
짐작했던
소식이었다.
내가
저물 녁 봄비에 적셔지면서
잠깐 잠길 거닐고 있을 때
그는
떠났다.
세상을.
어쩜 그렇게
끝까지 끝까지
힘들게 살다가 갈 수 있을까?
어쩜
그렇게 가지가지 고통들을 겪다가 가야만 했을까?
지금
이 순간
그는 어디쯤 있을까?
요 몇 날 동안
그는 뭘
생각했을까?
그가 미뤄놓은 일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가 담아온 생각들은.
(난 그걸 ‘사상’이라고 말하지만.)
더러는
크고 우람한 손길로
휘휘 엮어서
글로
그림으로
우렁차고 걸걸하고 쉰 소리로
욕을 해대며
(쌍욕도 거침없던 그)
휙 휙 세상에 던져놓았지만.
(얼마나 답답했을까?)
주체할 길 없어
담아둘 수 없어
늘 기회만 포착하면
쏟아내고,
혹시 요놈 받아줄 놈 아닐까?
내 말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살그머니 실웃음 띄운 표정으로
마구 마구 신들린 듯
탁류처럼
쏟아냈었는데.
제목조차 이상하고, 남모르는 소리들로 하양 종이를 채운
수 십 권의 책들을 내고.
누구나 좋아하고,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난을
수 백 장 쳤는데.
그 걸 알리려고
수 십 년 동안이나.
그 보다
더 많은,
그토록 많은 걸 남겨두고
떠나야만 하는 그의 마음은 어떨까?.
먼저 돌아간,
스무 살 남짓부터 그러께까지
온갖 일들로 괴롭혀댔던,
때때로
무서운 사람이라고
시커먼 눈썹 밑의 눈알에 장난끼 담으며
말해왔던,
어쩜
그보다 더 모진 삶을 살아온
그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면서
병상에서도 곧 떠날 자기보다
남겨둔 그 때문에
더 힘들게, 슬프게 생을 마감한
아내.
아내 주검 앞에 허리굽은 노인으로
절망감을 뿜어대던 노인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병자로서
외롭게 외롭게
사람들 만나 이야기한번 제대로 못하고 살다가
이제야
아내 품에 깃들여 질 행복감 때문에
남긴 것, 채 남기지 못한 것들 쯤
다 포기할 수도 있을 거다.
어쩜.
나는 알지.
얼마나 많은 선각자들이
슬프고
억울하게
삶을 놓아버렸는지.
버림을 받았는지.
그래서
놓고 떠나도
버리고 떠나도
잃어버리고 떠나도
특별한 게 아니란 것을
웬만큼은 알지.
그래도
내 삶의 한 시간들
내 생각의 한 조각들
내 앎의 한 부분들로
파고들고, 각인된
인연 때문인지
그가 남겨 놓지도 못한 것들에
억울해 하고.
역사학자이기 때문인지
그런 게
귀한 걸 잘 알고
필요한 걸 알고.
그래서
남달리 더
안타까워하고
야속해 하면서
치미는 슬픔과 분노에 차
결국 生을 이별한
그를 떠 올릴 수밖에 없다.
저는 다리로 쉬엄 쉬엄 걸어 가다
낡은 장승들 몇몇 모인 어디쯤인 가에 서서
꽤나 오래 짗었던 지팡이 걸쳐놓은 채
다리쉼 하고 있을
그 말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는
알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먼 길이 어디로 나고
끄뜨머리엔 뭐가 있는지
누가 기다리고
누굴 만나서 뭘 할지
대충은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아. 어쩜 이리도
힘겨운 삶
복잡한 삶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남들이 알 수도 있지만,
남들이 모르는
고통까지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을까?
사람들은
그를
젊은 날의 ‘그’로만 떠올린다.
내가 아직 간직한 ‘황토’에 실린 그 얼굴로
오적에 쓴 글씨들로
그의 시
그의 고통들로.
하지만
그는
팔순 노인으로 이제 삶과 이별했다.
그 긴 긴 시간 속의 그는
또 다른 그였다.
젊음의 ‘그’를 안고 살지만, 또 다른 ‘그’였다.
내겐
더 안쓰럽고, 감동 주고,
더 가치 있었던
그 삶들.
우리가, 내가
만약에 세상에 그를 알린다면
더 소중한 그 삶들.
그가 놓고 가는.
앞 길에 마중 나온 아내의 환한 웃음에
휴 이제 고생 다 끝났네
무서운 마누라 만났으니 이젠 안심했네.
신바람 내면서도
굳은 목덜미 돌려 얽은 얼굴에 그늘 드리우며
손짓하려는 건,
절룩이는 발걸음 더 절룩이게 만드는 건
놓고 가는
그 것 때문이리라
‘생명’
젊음을 저 만치 보낸 그는
투사가 아니었다.
시인이 아니었다.
운동가가 아니었다.
정치인이 아니었다.
생명.
언제나 사람인
흰 옷 입은 하늘같은 백성인
동학당에 뛰어든 ‘밥’ 만드는 농사꾼같은
그가.
세상에 주고
세상에 남기고
세상이 채 받지 못한 건
생명이었다.
그가
먼 먼 아주 먼
옛날부터
산 물 들판 동물 꽃 나무들 벌레들 통해
세상살이 통해
사람들 통해
전해받은 건
생명이었다.
그가
새파랑 젊은 날
새까망 현실,
새까망 감옥 속에서
마음 속으로 받은 건
빛으로 확인한 건
‘地下’가 아닌 ‘芝河’로 된 건
생명 때문이었다.
늘
그의 둘레를 어른거리는 생명들
틈 날 때 마다
그 생명들을 꺼내
보여주며 자랑하던 그.
헌 생명들 허물들 벗고, 새 생명들 돋은 곳들
끌고 다니며
보여주며, 설명하던
그.
싹수가 좀 있어 보이는 놈들 만나면
씨익 웃으며
싸인하며 건네주는 책
그 책들에 담긴 말은
‘생명’ 이었다.
결코 다 읽은 사람이 거의 없는 그 책들 속에
그가 남기고 간 생각들은
‘생명’ 이었다.
그렇게 평생
생명 찾아 다니며
생명 조각들 모아 세상에 돌려주던
그.
오늘
이승의 생명들 떠나
또 다른 세상의 생명들 얻는다.
늦은 봄날 늦은 오후 잠결에 느껴온 그의 이별.
전화로 들려온 그의 죽음.
가슴 갈피 갈피에 고여온 분노, 서글픔, 자책감들
무더기로 쌓아 놓고
뜯어온 관솔 던져가며 파랑 불길 지핀다.
송화가루와 뒤섞인 자색 연기들 모아 모아
굵은 뼈바늘 몇 개 만들어
멍들어가는 가슴에
무뎌갈 살점들에
문신들 깊게 깊게 새기며
암각화처럼
긴 잠 청해야 한다.
역사 속
언젠가 부활할
그의 ‘생명’을 떠올리며...
*오랫 동안이나 그의 아픈 얼굴을 못봤다.
몇 달 전에는 대문 밖에 서서 큰 목소리로 안부를 전했고,
먼 데서 들려오는 그의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천하의 김지하가--’
토지 문화관으로 가서 형수 앞에서 절하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오늘 난 숨죽이며 눈물 흘린다.
그가 영원히 생명을 얻길 빈다.
이 날. 2022년 5월 8일 |